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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2 09:36
파주
 글쓴이 : 인권연대
조회 : 2,255  

파주


손주영(북디자이너)

근황


회사를 옮겼다. 새로 옮긴 회사는 파주에 있는, 해외문학과 인문서를 내는 꽤(혹은 아주) 유명한 출판사이다. 매일 아침 여섯시 반에 일어나는 기적같은 일을 삼주 째 지속하고 있다.


문학팀 주간님 말씀으로는 과거 회사가 파주로 옮겼을 때, 두 달간의 간격을 두고 전 직원이 모두 병원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 옆에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급속히 비타민과 홍삼, 오메가 쓰리의 전도사로 바뀌는데, 멀고먼 출퇴근 거리와 새로운 환경이라는 이야깃거리가 더해져 요즘에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듣는다. 아직 어마어마한 주변의 우려에 반해 뚜렷한 이상 징후는 없다.


파주는 서울과 습도와 온도가 미묘하게 다르다. 기분탓이겠지만 2200번을 타고 이채쇼핑몰에서 내리면 주위가 달라진다. 기압도 조도도 소리의 파장까지 다른 기분이다. 출판단지는 원래 늪지대라 이곳 나무들은 습기가 많은 땅 때문에 죽어간다. 가장 높은 가지 끝부터 잎들이 말라가는것을볼수있다 . 다행히 아직 나의 순환계는 멀쩡하다. 더욱이 나는 파주가 마음에 든다. 이곳의 안개도 갈대도 낮은 깔린 풍경도, 어색하지 않다.


직장에서 나의 직급은 디자인팀의 대리이다. 전 직장에서의 대리로 지낸 기간까지 따지면 나는 이제  3년차 대리가 되었다.

대리라는 직급은 참 재밌다. 우선 남의 일을 대신 해주는 그 ‘대리’와 한자가 같다. 과장 대리 혹은 차장의 대리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사결정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 의사결정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팀장처럼 어떤 일정한 직책도 맡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아직 과중한 책임을 지기는 부족한 상태, 그래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상태다. 조직에서의 위치와 역할이 완성되기 전의 상태이고 전 단계이다.


직위의 문제만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도 나는 그 상태가 아닌가 싶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런 이유로 새로울 여지가 있는 상태. 이 미완의 상태에서 나는 나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나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낼지 고민한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하루하루를 완전하게 살아간다.



어긋남


환경이 바뀌면서 스스로에 대한 몇 가지 소소한 발견도 한다.


나는 나의 생각보다 더 내성적인 사람이다. 편한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회사 면접에서 주간님이 내게 물었다. 보기에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같은데 그래서 아래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 할 수 있겠냐는 얘기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순순히 나의 내성적 성격과 낯가리는 성격을 이실직고 했지만 사실 충격이었다. 내심 스스로를 쾌활한 면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순순히 인정하게 된다.


나는 색과 형태를 다루는 사람이다.

문학팀과 점심을 같이 먹는데 편집자 한 분이 말했다. 본인은 예전부터 색과 형태를 다루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조금 놀랐다. 이제 처음보는 사람에게, 나는 ‘완전히’ 색과 형태를 다루는 사람이다. ‘사실은 나의 전공은 따지고 보면 텍스트를 다루는 전공이며 나도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내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고, 나로서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긴 얘기를 하는 것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좀 즐거웠다. 드디어, 나는 이곳에 왔다. 이번에도 나는 인정한다. 나는 형태와 색을 다루는 사람이다.


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친구에게 이직 소식을 얘기하면 ‘네가 그렇게 큰 회사에 갈 일도 있다’며 놀란다. 경쟁 욕구도 별로 없고 기성에 대한 미묘한 반감이 있던 다소 사회부적응자 또는 아웃사이더. 아마 이런 이미지가 그동안 내가 고수해왔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실제로도 그런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새로 옮긴 회사가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니다. 출판사란 어느 곳이건 전체 산업에서 본다면 예외없이 비주류다.)

나는 내가 그리던 내 미래의 모습을 수정했다. 작은 곳에서 오래오래 하는 일. 대신 단 하나만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지금의 일을 최대한 오래오래 하기로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는 어느새 삼십대 중반의 유부녀가 되었다.



유일무이라기 보다 한 이삼천 명 정도



정확히 어느 텔레비전 프로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게스트로 출연한 안정환에게 패널 중 한명이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겠냐?


나는 차를 끓이고 있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누군가 다음에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 거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말고 아니라고 말하라고. 나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고. 다음 생까지 이어지는 결혼이라면, 내 경우 로맨틱하다기보다 저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사라 실버맨은 말한다. 이 세상에 자신과 맞는 사람 몇 천명 있다. 한 명이 아니라.


나와 남편, 우리 가족의 요리사는 남편이다. 남편은 요리를 하고 나는 설거지를 한다. 된장찌개도 청국장도 남편이 요리한다. 남편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식자재와 요리에 관련된 한국말은 거의 다 안다. 결혼 후 육아를 맡고 있는 친구가 ‘그래도 가끔 뭔가 해주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한다. 미디어를 통해 심어진 내 마음 한구석에서 너무 심하지 않나 싶지만 다시 스스로를 곰곰히 돌아보면 역시나 나는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정말 나는 요리에 아무 관심이 없다. 대신 나는 나의 방식으로 상대를 기쁘게 할 뿐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작가 임경선의 말이다. 이 말이 다만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 심지어 ‘남녀’ 사이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허락만 한다면 더 많은 일이 가능할 것이다.



<파주>



파주에는 안개가 낀 아침이 많다. 이 안개를 보고서야 오래 전 본 영화 <파주>가 어떤 영화인지 겨우 기억해냈다.

나는 이 영화가 비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또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저마다 다를 수 있는 밖에서 보는 것들,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들은 안에 다가가면 마주하면 미묘하게 다르다.

파주의 안개 속에 매일 걸어들어 간다. 무엇이 가능할 지 확신하기 어려운 어렴풋한 감각으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생각과는 다른 순간들을 마주보면서 미완의 상태에서 완전하게 하루하루 지낸다. 모두의 하루가 그러리라 대략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