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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2 21:15
과로사 공화국의 긴 역사
 글쓴이 : 인권연대
조회 : 495  
과로사 공화국의 긴 역사
- 게으름에서 부지런함을 거쳐 과로사까지-


글_ 강수돌(고려대학교)




  “보통 사람들은 그 시간의 절반 이상을 빈둥거리며 보낸다. 그래서 일례로, 기나긴 여가 시간 동안에도 자기 집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기는커녕 그저 문간에 멍하니 걸터앉았거나 긴 담뱃대나 빨고 있다. 아니면 그냥 땅바닥에 우두커니 누워 있거나 한가하게 낮잠이나 잔다.”
  따뜻한 동남아를 여행한 관광객의 말이 아니다. 미국인 탐험가이자 지식인인 조지 케넌이 19세기의 <타임즈>라 할 <아웃룩>의 통신원으로 19세기 말 조선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당시 일본과 조선을 이렇게 대비했다. “일본인들은 깔끔하고 모험심이 강하며 지적이고 부지런한데 비해, 조선인은 지저분하고 무식하며 천성적으로 게을러빠졌다.” 
  하기야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근대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상당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비하면 1890년대 조선은 아직 원시적이고 낙후한 사회였다. 현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우는 데 기여한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도 “한국인은 더럽고 게으르고 야만적”이라 했다. 그 뒤 독일 지리학자인 헤르만 라우텐자흐 역시 한국을 여행하고 1940년대 초반에 펴낸 책에서 “한국인은 게으르고 무심하며 굼뜨고 거만하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진실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산업화 물결에 휘감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농촌에서는 사람들이 두레나 품앗이 등 공동체적 노동조직 속에서 일과 휴식, 놀이를 비교적 조화롭게 통일시키고 있었던 점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수탈자들에게 덜 빼앗기기 위해 자체적으로 노동의 강도나 속도를 조절하려는 내부의 자율성도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민중이 힘든 노동 뒤에 새참이나 점심을 즐기고 낮잠 한 숨 자는 모습을 보고 ‘청교도 정신’에 충만한 서양 선교사들은 쉽사리 “게으른” 조선인들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즉, 조선인들은 봉건 권력과 제국주의의 수탈이나 침탈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도 나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인의 모습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180도로 변한다. 더 이상 “게으르고 동작이 굼뜬” 조선인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빨리빨리” 일하는 한국인이 된 것이다.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까지라고 정해져 있었지만, 12시 30분이 되어야 식당으로 뛰어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이 현장으로 뛰어 와서 열심히 일을 한다. 잔업을 안 하면 7시 퇴근, 잔업을 하면 퇴근이지만, 그 시간도 아랑곳없이 일만 계속한다.” 17살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 가발공장에서 10년째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1980년대 초반에 쓴 글이다. 그들은 ‘군기’ 잡힌 노동자로, “수출 역군” 내지 “산업 전사”로 불렸다.
  물론, 가혹한 노동조건을 견디지 못해 탈출하는 이도 많았다. “입사 후 일주일 이상 견뎌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오랫동안 다니고 있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내가 처음 입사할 때는 600여 명이나 되던 공원이 이제는 350명밖에 없다.” 규율노동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들은 개인적 이탈을 선택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은 개인적 이탈만이 아니라 조직적 저항 의지로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들 넷은 그 전에도 몇 번인가 해 본 잔업거부 쪽지를 돌리기로 했다. 월급을 미루거나 강제잔업을 시키려고 하면 곧잘 이런 단체행동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 쪽지 내용은 이랬다. “얘들아, 임금인상 실시할 때까지 매일 잔업을 거부하자. 5시 30분이 되면 일제히 스위치 끄고 나가는 거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의 소소한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집단행동조차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합리성 안에서 일어난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분신 항거했던 청계천의 청년 재단사 전태일조차 근로기준법이 지켜지고 인간적인 관리 통제만 이뤄졌다면 굳이 분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노동자도 정당한 월급을 받으며 차별대우 받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1970~80년대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인간다운 노동을 꿈꾸면서도 규율 노동에 스스로를 적응시켜 나갔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었고 전노협, 대기업연대회의,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창립되고 노동법 개정 운동이 활성화하는 등, 약 10년 간 민주노조 운동이 전국을 달구었다. 실질임금이 올랐고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1997년 이후 거세게 닥친 ‘IMF 트라우마’가 노동운동과 전 사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자본의 공세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현장을 강타하면서 정리해고 물결이 노동자 삶을 집어삼켰다. 위기가 아니라도 상시적 구조조정이 행해지고 첨단기술은 곧 고용불안으로 다가왔다. 늘어나는 비정규직, 근무평가와 성과주의는 노동자 내부 경쟁을 부채질했다. 청년들은 낭만과 지성의 여유 대신 오로지 취업에 목을 매고, 노동자들은 ‘있을 때 벌자’는 심정으로 잔업, 철야, 특근을 마다 않으며, 심지어 노동조합조차 물량투쟁에 힘쓰고 (재벌의 ‘경영세습’과 경쟁하듯) 노동자의 ‘고용세습’까지 따낸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삶, 공짜 잔업이나 열정페이도 감수하는 삶, 일이 내 정체성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삶, 그리하여 마침내 매년 1만여 명이 뇌출혈이나 심장마비, 우울증 등으로 과로사하며, 해마다 1만 3천명이 자살하는, ‘일중독 대한민국’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죽도록 일하는  존재의 허망함이다.
  “아직 잘리지 않고 있을 때 많이 벌자!”거나 “더 많이 벌 수 있게 노조 대의원이 물량 투쟁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일중독’ 정서, 심하게는 동료가 과로로 쓰러져 죽어가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리빨리’ 일만 하거나, “가족이나 친구와의 친밀한 관계보다는 일터에서의 생존과 승진에 목숨을 거는” 수많은 ‘일중독자’의 병리적 행위, 그리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함께 할 수 없다.”거나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놓고선 어디서 감히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라는 ‘탈연대’ 논리 등이야말로 사회 곳곳에서 과로사를 우리 스스로 부르는 논리다. 제도적으로 수많은 노동시간 단축 논의나 법정 노동시간 단축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에서는 바로 이런 실제 모습들이 여전히 우리 삶을 짓누른다. 

  바로 여기서 필요한 질문이 있다. 이렇게 사는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가는가? 내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삶의 기쁨과 여유를 즐길 것인가? 남북 간 공존과 화해 못지않게 이런 질문들 역시 우리에게 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