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인권만사는

추명구(대전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 오임술(민주노총 대전본부 노동안전국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이채민(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임병안(중도일보 기자)님과 같은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인권현안에 대해 2주에 한 번씩 글을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애는 누가 보나요?

작성자대전충남인권연대 작성일20-02-19 19:40  |  33 읽음

글_최예린(한겨레 기자)


나는 24개월 된 자식을 둔 엄마다. 1년3개월짜리 육휴(통상 출산휴가 3개월에 유아휴직 기간 더한 시간을 일컬음)를 끝내고 일터로 내몰린 지 11개월 된 ‘워킹맘’이기도 하다. (공공기관 정규직처럼 3년의 유·무급 육휴가 보장됐다면, 무조건 그 제도를 활용했을 테니 ‘내몰린’ 것이 맞다)


 “그럼 지금 애는 누가 보고 있나요?”

복직한 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네가 여기 밖에 나와 있는데 너의 자식은 지금 어디에 누구와 있느냐고 묻는 말이다. 이 질문의 용례는 여러 가지다.

 

첫째, 내가 일하는 동안 누가 아이를 돌보고 있는지를 물을 때 쓰인다. 이 경우 질문자가 예상한 답변 1위는 친정어머니, 2위는 시어머니, 3위는 나와 내 남편의 ‘형제나 친척 중에 여성인 자’, 4위는 시간제 육아도우미쯤이다. 아이의 아빠나 할아버지, 혹은 삼촌 등 남성 가족을 ‘아이를 종일 돌보고 있을 사람’으로 염두에 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자식은 부모가 일하는 오전9시∼오후6시까지 때로는 저녁 8시까지 시립어린이집에서 지낸다. 내 답변에 대한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아이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장시간 사회생활 중인 내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의 탄식일 테다. 

 

다음으론 내 배우자를 안쓰럽게 여길 때 쓰인다. 주로 내가 야근을 하거나 저녁 술자리에 있을 때 (질문) 당한다. 이때 남편은 자식의 ‘공동 육아 책임자’가 아닌 ‘유별난 일을 하는 여성을 배우자로 둔 남성’으로 인식된다. 늦은 저녁 나의 위치가 ‘밖’일 때 나의 부모나 내 배우자의 가족은 “애는?”하고 묻는다. 당연히 “아이는 아빠랑 집에 있다”고 답하면 매번 비슷한 반응이다. “아이고.......” 얼핏 앞의 용례와 같은 탄식같이 보이나 이 경우 ‘안타까움’의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내 배우자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누구보다 내 부모의 반응이 가장 드라마틱하다는 것이다. ○서방이 웬 고생이냐, ○서방한테 미안해서 어떡하냐, ○서방 같은 사람도 없다 등의 말을 연속으로 쏟아내신다. 사위와의 통화에서는 바쁜 딸을 둔 부모로서 사죄까지 더해진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밥은 어찌 먹었는가, 자네 이러다가 사회생활(저녁 술자리를 의미한다)에 지장을 받는 건 아닌가, 우리가 애도 못 봐주고 자네 볼 면목이 없네, 따위의 고해성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몸이 아파 딸 대신 손자를 돌보지 못하는 내 어머니는 더 괴로워하신다. 아직 경제 활동을 하는 아버지 역시 스스로 ‘딸 가진 죄인’이 되길 주저하지 않으신다.

 

그 시각 나는 같은 질문을 또 듣는다. 일 때문에 만난 취재원이던, 친목으로 만난 지인이던 “그럼 지금 애는 누구랑 있나요?”라고 쉽게 묻는다. 이때 대개 질문자의 성별은 ‘남성’이다. 당연히 또 “애는 아빠와 집에 있다”고 답하면 이번에도 “아.......”라는 반응이다. 이때의 말은 대개 내 배우자를 ‘불쌍히’ 여기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용도다. 가끔 ‘욱’한 내가 “아빠가 술 먹을 땐 제가 보지요”라고 ‘콕’ 집기라도 하면 질문자의 얼굴에 당황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스친다. 어쩌다 ‘아, 그렇지. 그렇군요’ 정도의 깨달음의 반응도 있다. 이 경우엔 “라떼(나 젊을 때)는 밖에 나가 일하느라(저도 지금 일하는 중인데요?) 애가 어찌 크는지도 몰랐다”거나 “애들 도맡아 챙기느라 우리 집사람 혼자 고생 참 많았다”식의 자아 성찰로 이어지곤 한다.


복직 뒤 반년쯤 지났을 때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도 밖에서 일하거나 술을 마실 때 “애는 지금 누가 보냐”는 질문을 받았느냐고. 내 자식의 아버지는 “애는 잘 크고 있냐”는 안부 말은 자주 듣지만, 애를 누가 돌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참고로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은 평소 나보다 4~5배 많은 저녁 약속을 수행 중이다. 그에게 바꿔서 “당신은 남성인 동료를 만났을 때 상대의 자녀가 지금 현재 누구와 있는지 궁금한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딱히 없다”고 답했다. 저녁 자리에 여성이 있을 경우 본인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말도 이어졌다. 


내 자식의 공동 양육자인 남편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말을 매일같이 듣고 살면서 나의 마음은 자주 어지럽다. 일상적으로 툭툭 던져지는 “애는 누가 보냐”는 말이 작지만 잘 빠지지 않는 가시처럼 촘촘히 가슴에 박힌다. 어린이집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는 아이가 힘들어하거나,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거나, 우는 아이를 옆에 두고 일을 해야 하거나, 야근하거나, 출입처와 저녁 약속이 있을 때는 어김없이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하면 당연한 육아가 남편이 하면 대단한 것이 되는 ‘불공평한 일상’을 경험하면서 억울함, 분노, 슬픔이 버무려진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응어리진 마음이 비수로 변해 열심히 육아 중인 애먼 남편을 모질게 찌른 뒤 느끼는 자괴감도 만만찮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식과 남편, 나와 남편의 가족에 더해 세상의 모든 이에게 자꾸만 미안하고 쪼그라드는 일상적 ‘사죄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이다.


 악은 평범하다 했던가. 우리 안의 차별과 편견 역시 평범한 모습일 때가 많다. “애는 누가 보냐”는 선량한 얼굴의 말이 ’어린 자식을 남에게 맡겨두고 집 밖으로 나온 엄마’를 더 슬프게 하는 것처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