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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만사는

손주영(북디자이너), 추명구(대전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 오임술(민주노총 대전본부 노동안전국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이채민(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임병안(중도일보 기자)님과 같은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인권현안에 대해 2주에 한 번씩 글을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공상

작성자인권연대 작성일18-10-31 10:37  |  327 읽음

손주영(북디자이너)




신혼여행

내게도 운명적 만남, 결혼, 신혼여행 등등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심지어 구체적인 로망이 두 개나 있다. 이건 내 입장에서는 웃긴 얘기인데, 나는 나 스스로를 ‘로맨스에 대한 로망은 세뇌된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 덧붙여 말하자면 ‘결혼에 대해 얘기할 때는 항상 적당히 냉소적인 리액션을 취해야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넣어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부류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인지, 실제 나 말고 또 누가 더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은 일단 넘어가자.

대신 두 가지 로망이 무엇인지 말해본다. 둘 다 신혼여행에 관한 것이다.

나는 10년 전쯤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 결혼은 안 할 것이지만 만약에 만약에 한다면 신혼여행은 네덜란드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에는 댐을 만들면서 생긴 커다란 인공호수(지금은 생각나지 않아서 실존할까 싶은, 언젠가 인터넷 검색해서 봤다.)가 있는데 이 호수는 아주 크기 때문에 물방울이 호수 상류로 들어가서 빠져나오는 데까지 15년이 걸린다고 했다. 신혼여행에서 나는 그 호수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5년이 흐른 뒤에 다시  호수를 보러 간다. 그렇게 또다시 15년의 시간을 가둬놓는 것이다.

둘. 결혼은 정말 안 할 것이긴 하지만 만약에 한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하는 남자와 첫 눈에 눈이 맞아서 결혼하면 좋겠다. 그래서 신혼여행은 꼭 그리스로 가는 것이다!



공상은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에 공상이다. 그래도 이 두가지 공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몇 가지 댈 수도 있다. 첫째, 결혼은 신혼 여행지를 고르는 것을 포함해 혼자가 아닌 둘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네덜란드는 너무 멀고 나는 호수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셋째, 네덜란드도 그리스도 멀지만 요즘의 해외여행은 언제라도 갈 수 있는 일로 바뀌었다. 넷째,  저런 생각을 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실제로 읽은 남자(인 사람)를 만난 것은 5년 후의 일이다. 물론 딱히 물어본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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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남짓 지난 지금 나는 결혼도 했고 신혼 여행도 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아직) 읽지 않은 남편과 결혼했고 신혼여행은 태국의 방콕과 끄라비로 갔다.

우리가 갔던 태국은 어떤 나라인가. 공항버스가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대신 사람들이 자리를 모두 채운 만석일 때 출발하는 나라다. 기후 따뜻하고 음식이 싸고 아침마다 파인애플 주스를 무한리필 해주는(우리가 묵은 숙소에서는 그렇다.) 나라다. 그 중 끄라비는 푸켓보다는 덜 알려진 휴양지인데, 우리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내 택시 사업의 고객이 되어, 동물모양의 쿠션이 뒷좌석에 있고 초등학생 아들의 사진 액자가 운전석 앞에 놓여 있으며 (아마 철지난) 태국 가요가 나오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길거리 음식들을 안타깝게 스쳐지나면서 오토바이를 배우고 또 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편두통

며칠 전 일이다.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길을 걷다가 깜짝 놀란다. 상점 옆에 색과 형태가 짓이겨진 뭔가를 봤다. 죽은 고양이인가 싶다가 다시보니 죽은 비둘기인가 싶다. 다시 보니 바나나 껍데기다. 몇 시간 뒤에 또 깜짝 놀란다. 길가에 이번에는 정말 죽은 고양이인가 싶다. 아니다. 죽은 개인가 싶다. 다시 보니 바닥에 버려진 검은 우산이다. 바람에 우산 한쪽이 펄럭이고 있다.

그런 날은 편두통이 오는 날이다. 무거운 머리로 깨어나 색과 소리에 이유 없이 민감해지고 가볍게 시작한 작은 점 같던 통증은 머리통 한가득 울린다.



이렇게 시작하기도 한다. 길을 걷다가 문득 내 눈이 대상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점이 어긋난다. 나는 내가 방금 전에 보는 대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시야의 한쪽 구석에서 지글지글한 파동이 보인다. 파동은 곧 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렇게 30분쯤 후면 시야가 개이고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하루 이틀은 돌덩이 하나를 머리에 매단 것 같은 둔탁한 두통의 시간이 찾아온다.



수면시간이나 과한 카페인이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몸이 가볍고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한 날에도 찾아오기도 한다. 육개월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기도 하고 일주일 주기로 오기도 한다. 근 10년쯤 되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두통이 오면 이부프로펜도 소용 없고 타이레놀도 소용 없다. 이럴 때 내가 유일하게 진정하는 방법은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 뿐이다.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고 이런 순간이 지나간다는 분명한 기억을 붙잡는 것 뿐이다.




사회제도, 법, 도덕, 상식 등등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사회제도,법, 도덕, 상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효율적인 방식이 아닐까. 세대를 거듭하여 수정하고 정비해가며 쌓인, 별다른 재능이 없는 특별하지 않은 개인도 절망보다 희망의 가까운 상태를 전 생애에 걸쳐 유지하며 지낼 수 있게 만드는, 인간들의 최고 발명품은 아닌가. 어쩌면 많은 부분 나는 지금껏 이것들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일 수도 있다. 끊임없이 불화하더라도 말이다.




날씨이야기

나는 이제 날씨이야기를 즐겨한다.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다. 날씨이야기는 적어도 모두가 아는 사교의 기초이다. 오늘 날씨가 좋(나쁘)네요, 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당신과 나는 근본적으로 관점이 다르고 당신은 나를 무의식 중에 하찮게 여기고 있다, 며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나 현명한 일인가. 동시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살아)있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늘의 모양과 공기의 차가움을 얘기하며 우리는 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만끽한다. 리스크가 아주 작아 효과도 미약하겠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시들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족과 남편과 직장동료와 친구들과 시도 때도 없이 한다.




공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삶이 내 빈약한 상상대로 펼쳐지지 않는 것도 다행이다. 공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 구체적으로 맞이하는 상상 너머의 세계는 얼마나 생생한가. 네덜란드의 인공호수를 보는 것보다 끄라비에서 물안경을 쓰고 열대 물고기를 보는 일이 어쩌면 훨씬 내가 바라던 일일지도 모른다. 때에 따라서, 답이 나오지 않는 논증과 반박의 첨예한 대화보다 독감과 폭설에 대한 엄살에 가까운 우려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이 상대방을 더 배려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의지는 나의 삶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약하다, 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아니 애초에 통제란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두통조차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개인이 속한 집단의 상식(보편적 가치관과 제도)이 중요하고 이를 좋은 방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민의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읽고 쓰는 것이 아닐까. 낮에 두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밤에 꿈속에서 그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인물은 조르바도, 화자 나(두목)도 아닌 어떤 마을의 노인이다. 조르바의 회상에서 나왔는지 나의 회상에서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 노인은 한번도 자기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세상사를 훤히 안다. 만나는 여행자들에게 그들의 여행 얘기, 세계 방방곡곡의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한번도 떠나지 않았지만 모든 곳을 돌아봤다. 나도 그 기술을 꼭 배우리라 생각한다.



사실 실현되지 않는 공상은 실현되지 않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공상이 실제로 이곳에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했던 그 무엇을 또 다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만이, 상상만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며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온전한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작은 마을에 있으면서 마음은 더 먼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가능한 더욱더 멀리. 언제 끔찍한 것을 보게 될지 신경이 곤두서지만,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요즘 내가 생각하는 일들이다. 별 영양가는 없는 얘기지만 공유해본다. 길가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곧 떨어질 것 같다, 처럼 무해하고 리스크가 적으며 당연한 이야기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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