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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고려대 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양해림(충남대 교수), 장원순(공주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과 침묵의 봄

작성자대전충남인권연대 작성일20-02-05 16:42  |  32 읽음

강수돌(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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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1895~1970)의 대표작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5년간 군인으로 전쟁터에 갔다 온 뒤, 1913년 프랑스 남부 고산지대를 여행하던 중 엘제아르 부피에라 불리는 55세 노인(?)을 만난다. 그는 아이와 아내를 모두 잃고 혼자서 양치기로 살고 있었다. 노인은 매일같이 황무지 산비탈에 도토리 100개씩 심었다. 무려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땅을 살리려고. 그래서 황무지에 떡갈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 커다란 숲이 만들어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부피에 노인은 여전히 나무를 심고 숲을 지켰다. 그 사이 숲속엔 새들이 알을 까고 노래를 부르며 온갖 들짐승이 집을 지었다. 맑고 시원한 샘물까지 생겨났다. 처음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던 황무지. 그 곳에 울창한 떡갈나무 숲이 생기면서 근처 마을엔 마침내 1만 명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텃밭에선 싱싱하고 맛깔스런 채소도 자랐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주인공이 쓴 책이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한편, 이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것도 있다. 1962년 미국의 레이첼 카슨(1907~1964)이 쓴 <침묵의 봄>이다. 이 책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고발한 책이다. 과학과 기술을 맹신하던 20세기 중반의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레이첼 카슨은 과학자와 기업가들이 진실을 은폐하며 자연을 망치고 나아가 사람들 건강까지 해친다고 고발했다. ‘지구의 날’이 제정된 배경이다. 왜 ‘침묵의 봄’인가? 평화롭고 아름답던 시골 마을에 갑자기 동물이 죽어나가고, 숲과 강은 서서히 생명력을 잃다가 들새와 물새도 사라지는 등 봄의 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봄이 되면 새소리로 시끄러워야 하는데, 너무나 조용하다. 그래서 ‘침묵의 봄’이다. 원인이 무엇인가? 알고 보니,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자 사람들이 뿌린 ‘흰색 가루’였다. DDT라 불리는 화학물질, 살충제였다. 벌레를 죽이기 위해 살충제, 제초제를 뿌려대니, 벌레가 사라졌다. 벌레가 없으니 새들이 올 리 만무하다. 살충제, 제초제는 지하수도 오염시키고 흙속에도 쌓인다. 이 유해물질은 생명체의 몸속에 축적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식물, 동물, 사람 등 먹이사슬 뒤로 갈수록 고농도로 축적된다. 마침내 유전자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발암물질이 되어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리고 나면 극히 일부의 풀이나 벌레는 내성이 생겨 더 강한 존재가 된다. 결국엔 더 강한 농약이 나온다. 마침내 사람도 버티지 못한다. 비극적이게도, 이를 연구하고 책까지 쓴 레이첼 카슨조차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는다. 레이첼 카슨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자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함께 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침묵의 봄>이란 책이 별 문제 없이 출간되었을까? 아니다. 이 책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농약 제조업체와 화학업체 등에서 각종 모략과 방해를 했고, 그들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도 한 패로 움직였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일단 책이 나오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J.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뒤 1963년에 ‘환경문제자문위원회’를 백악관에 설치하고, 1972년부터 미국 환경부에서 DDT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DDT 살포가 중단되었고, 이때부터 전 세계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장 지오노의 소설 같은 이야기와 레이첼 카슨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함께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가지만 같이 생각해 보려 한다.


첫째,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나무를 심는 일과 DDT를 뿌리는 일이 지극히 대조적이다. 특히, 나무의 선순환 경로와 DDT의 악순환 경로를 비교해 보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나무의 선순환 경로는 이렇다: 황무지 → 도토리 심기 → 나무 자라기 → 숲의 형성 → 새와 동물 서식 → 샘물과 개울 → 아름다운 마을 형성. 반면, DDT의 악순환 경로는: 농작물에 DDT → 풀벌레 말살 → 새들이 죽거나 오지 않음 → 황량한 숲 → 수질, 토질, 인체 오염 → 마을의 황폐화. 전자가 삶의 경로라면 후자는 죽음의 경로다.


둘째,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두 경로를 차이 나게 한 근본 원리는 무엇인가? 나무의 선순환 경로 뒤엔 인간성, 생명성, 일관성의 원리가 작용한다. 이 속에 깃든 마음도 다르다. 아무리 척박한 황무지라도, 아무리 혼자 사는 노인이라도, ‘매일’ 할 수 있는 실천을 통해 황무지를 숲과 마을로 바꿀 수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이다. 또, 전혀 서두름 없이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실천을 한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루 100개의 도토리 중에 10개만 살아도 숲은 만들어진다. 인디언 기우제처럼 ‘될 때까지’ 하면 된다. 올바르고 건강한 방향이니까. 노인이 심는 나무는 상품이나 화폐, 자본, 노동과 전혀 무관하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한 것이 아니다.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양심)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놀이와 취미와 일이 구분이 안 되는 수준. 반면, DDT의 악순환 경로를 보자. 이 경로의 기저엔 효율성과 생산성, 수익성 원리가 작동한다. 이미 상품이 된 농작물, 이왕이면 같은 땅에서 더 많은 곡식과 채소를 얻자. 벌레가 농작물을 먹지 못하게 박멸하자. 벌레가 조금만 먹어도 상품성이 떨어진다. 풀이 영양분도 뺏어 가니 없애버리자.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자. 남보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을 만들려면 DDT는 필수다. 인체에 좀 해롭더라도 금세 문제는 나타나지 않으니 좀 참자. 돈과 상품이 중요하니까. 이게 자본의 논리다. 이 지점에서 자본은 생명과 적대한다.


셋째, 스위스 다보스에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다. 트럼프는 “우리도 나무 1조 그루 심는 데 동참하겠다.”며 “비관보다 낙관할 때다.”라며 은근히 그레타를 비판했다. 이에 그레타는 트럼프에게 “나무 심는 걸로는 부족하다며 당장 온실가스 배출을 중단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레타의 문제의식을 보다 심층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성장 패러다임을 중단해야 지구가 겨우 살까 말까 한다는 이야기다.


이제, 나는,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나무를 심더라도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트럼프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상품, 화폐, 자본, 노동 물신주의에 빠져 그저 지구의 파국만 기다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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