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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배재대 교수), 장수명(한국교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 양해림(충남대 교수), 강수돌(고려대 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장원순(공주교대 교수)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일류대 경쟁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작성자인권연대 작성일18-12-09 00:35  |  270 읽음

강수돌(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해마다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대학 입시를 치른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수록 대학진학률이나 학생수가 줄어든다지만 여전히 한국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은 70% 내외이고 수험생은 수십만 명이다. 어쩌면 이 강고한 대학입시 ‘덕에’ 상대적인 안정성을 누리며 먹고사는 사람들이 꽤 많은지 모른다. 당장 대입 학원들이 그러하고, 전국의 고교가 그러하며, 입시 상담사(코디네이터)가 그러하다. 따지고 보면 유치원부터 초, 중, 고교 전체가 대입 덕에 ‘별 탈 없이’ (아니, 탈이 생기더라도 별 문제 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대학들(교직원 포함) 역시 그러한 사회적 믿음과 과도한 경쟁 열풍 덕에 ‘말없이’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사회 전체가 대학 입시를 하나의 커다란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입 경쟁에 목을 매는가?

  특히 최근 뉴스 하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생각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렇게도 ‘목숨 걸고’ 들어간 서울대에서 그 재학생들이 2명 중 1명꼴로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서울대학교 학생복지 현황 및 발전방안 최종보고서’의 한 내용으로, 서울대 평의원회 연구팀이 서울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6월 18일부터 7월 15일까지 ‘불안 및 우울 정도’에 대해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응답자 1760명 중 818명(46.5%)이 우울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적으로 한국 최고의 대학에 다니면 가장 행복하거나 별 걱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결과는 그런 세간의 인식과 대비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언론들이 전하는 바로는,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다 과열된 학점 경쟁 등이 청년들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학생들은 교우관계나 학업문제, 진로문제 등으로 인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대학생들이라 자부심도 강하고 만족도도 높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고의 학생들끼리 경쟁을 하다 보니 ‘말 못할’ 고민도 많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졸업장 하나로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도 옛날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나는 2015년 12월에 한 서울대생이 자살한 일을 떠올린다. 그가 자살하기 20분 전에 페이스북과 서울대 학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올린 글을 보자.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는 근거 없이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이다.” “죽는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었다.”

  그는 서울대 학생이기 이전에 한 중산층 가족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한 청년이자 인격체였다. 그런 그가, 아직도 피어나지 못한 그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스스로 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미래 희망이 ‘수저 색깔’에 의해 결정된다는 냉혹한 현실, 나아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존 경쟁’이라는 현실이었다. 



  그 뒤 3년이 지났다고, 또,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가 탄생했다고 사태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의 우울증도 증가한다. 물론, 어느 전문가의 진단처럼, “현재 대학생들은 IMF 구제금융 시대에 태어나 가정이 기우는 경험을 했고 고등학생 때는 세월호 참사도 겪은 세대”인 상태에서 “여기에 취업난으로 인한 과열경쟁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미래와 연관된 정서적 불안감이 증폭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기성세대가 경험한 ‘IMF 트라우마’와 더불어 2014년의 ‘세월호 트라우마’는 국가도, 노조도, 기업도 내 자신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인식을 강화했고, 취업난과 과열경쟁은 사회적 연대가 아니라 ‘각자도생’만이 살아남는 길이란 의식을 부채질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각자도생, 즉 (타인의 삶에는 지극히 무관심한 채) 제각기 제 살 길만 도모하는 ‘팔꿈치 사회’가 심화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끝에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대 학생들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건 아닐까?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나 그 기저에 깔린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 따라서 ‘부적응자’의 (재)적응을 위한 각종 심리상담(예, Wee 스쿨, 생활심리 상담소) 등 노력은, 응급조치는 될지언정 사태의 본질적 해결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트라우마와 그 기저에 깔린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한마디로, 폭력이다. 이 폭력은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언어적, 행위적, 시각적, 제도적, 문화적 형태로 표출된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것은 물리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의 결합이었다. 일베나 학폭, 극우 세력의 폭력은 언어적, 행위적, 시각적 형태가 결합되어 있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시장 경쟁 내지 경쟁지상주의는 제도적, 문화적 폭력의 결합이다.

  이승만 이후 남한 권력이 민중을 대하는 태도는 물리적 폭력과 제도적 폭력이었다. 그런 사회 속에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생존의 두려움에 떨면서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강자(승자) 동일시’을 채택했다. 일제가 승리하자 친일파가 설쳐댔고, 미군정이 들어오자 미군에 따라 붙었다. 전쟁이 나고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자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어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돈 벌고 출세한 사람이 생기자 그들을 숭상하며 너도 나도 성공과 출세의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렇게 해서 전국에 ‘교육열’이 활활 불탔고,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우리가 당연시 해온 ‘SKY 대학’ 숭배 문화다.



  일례로, JTBC 주말 드라마인 ‘SKY캐슬’은 자식을 서울대 의대에 보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강박증을 가진 부모들 이야기가 나온다. 부모의 엄청난 재력(이른바 ‘금수저’)을 전제한 상태에서, 탁월하면서도 영악한 코디네이터(진학 설계사, 상담사)의 힘에 기대어 아이가 서울대 의대에 진학을 했으나, 아이는 결코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안다. 실은 (엄마가 원하는) 서울대 의대 입학 뒤에 아이가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자살이나 이별 포함)하는 것이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놀랍게도 그 코디네이터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동기부여한 방식이 바로 이 ‘복수’ 논리였다.) 아이의 일기장에는 엄마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잔인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을 나중에야 보게 된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고 마침내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 근거(정체성)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지켜본 다른 엄마 역시 (코디에게 일시적으로 분노했으나) 더 깊은 성찰을 하지 않은 채, ‘그래도 내 새끼는’이란 생각에 역시 자기 자식을 서울대 의대에 꼭 넣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동일한 코디네이터에게 지도를 애걸하며 무릎을 꿇는다.



  과연 이 부모들의 강박증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그것이 앞의 ‘강자 동일시’ 심리에서 온다고 본다. 불편한 진실이다. 폭력이나 경쟁은 이것은 우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내면 깊은 곳에 깃든 열등감을 벗겨내기 위해 (또는 초지일관 승승장구한 경우, 천하무적의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라도 닥쳐올지 모르는 탈락의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생존 전략이다. ‘SKY캐슬’의 경우에는 이 부모의 ‘강자 동일시’ 심리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자기 열등감 억압의 수단 내지 강자(시어머니)로부터 인정(사랑)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쓰일 수 있음이 소상히 드러난다. 



  이제, 이 폭력적 경쟁과 그것이 낳은 강자 동일시 심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서울대생으로 상징되는 오늘날 모든 청년들(실은 우리 모두)의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또는 공격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서 말한 ‘불편한 진실’들을 인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힘든 현실 뒤에 숨은 불편한 진실들을 찾아내고 제대로 정리하는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그 학습의 결과, 우리 스스로가 다양한 트라우마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남과 대화가 절실하다.

  셋째, 그렇게 둘러 앉아 차나 밥도 나누면서 친밀한 분위기 속에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가운데 경쟁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할지, 어떤 식이 가장 좋은지 탐색해 나가야 한다.



  그런 탐색의 길,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다. ‘값싼’ 해법은 없다. 하지만, 여럿이 같이 하면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즐거울 것이 아닌가. ‘나홀로’ 성공한 뒤에 우울증에 빠질 것이 아니라, ‘더불어’ 나서는 길 위에서 삶의 기쁨과 관계의 즐거움을 찾을 일이다. 성공과 출세, 권력과 재력의 길이 폭력, 복수, 두려움을 낳는다면, 그에 대한 대안은 분명 사랑과 연대, 우애와 환대의 길 위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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